돌아 온 악당

돌아 온 악당

2013년 2월 1일 오후6시.
새벽이면 떠 놓은 물이 얼음이 돼버리는 곳에서 며칠 밤을 새우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30평의 넓이에 한 겨울 내내 몸 한쪽만 겨우 녹일 수 있는 전기스토브가 전부였던 곳. 일단은 ‘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곳에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공간을 뜻하는 ‘空’인듯 싶다가, 공장들과 같이 있어서 ‘工’인가도 싶고, 당장 기타 굉음이 흘러 나와도 그럴듯하게 어울릴만한 곳 이기에 ‘公’이라 하나보다 싶은 그런 곳. 그날, 내눈엔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잘 놀고, 잘 마시고, 잘 떠드는 서찬석의 첫번째 개인전 오프닝은 나에겐 락페의 첫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설레임으로 기억된다.

음향 시설조차 없었던 때 인데도 내 귀에는 공연의 시작을 준비하는 베이스와 드럼의 둥둥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사실, 그 겨울 처음 만난 서찬석. 이은정 작가를 통해 ‘공’에서 개인전을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해도 그저 놀기 좋아하는 동생으로만 생각했었기에, 그 며칠동안 ‘공’이라는 결코 좁지 않은 빈 공간을 채워 놓은 크고 작은 작품들의 수만으로도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전시의 막이 올랐을 때 40여년 전에 일터로서 그 공장을 왁자지껄 가득 채웠을 시간이 되돌아온 듯, 수많은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재습은 없다
서찬석의 첫번째 개인전 ‘악당의 역습’은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 왔던 낡은 공장 건물에 기습적으로 ‘공’이라는 이름과 ‘서찬석’을 새겨 넣고, 앞으로도 종종 괴롭히거나 놀릴 것만 같은 여운을 남긴 채 짧은 일주일은 끝났다.

그후 5년의 시간 동안 서찬석 작가에게 나라는 사람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일개의 팬이었던 것 같다. 전시가 있으면 조용할 때 슬쩍 들러 보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가끔은 술친구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업계의 동료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야자하던 소년의 서찬석과 공은 어느새 ‘서찬석 작가’와 ‘인디아트홀 공’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이래저래 ‘인디아트홀 공’에 ‘악당의 재습’은 다시는 없을 것이란 확신도 들었다.

2018년 1월 19일 새벽1시의 락스타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그런 이야기. 그래서 This is (NOT) a Love Song이다. 내장이 다 드러나는 몸과 핑크핑크, 공중에는 천사가 날아다니고, 벽에 자리잡은 호랑이는 순간적으로 보는 이를 뒷걸음치게 한다. 지난 5년의 시간은, 서찬석 작가로 하여금 누구나가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들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했을 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서정’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될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었나 보다. 실재하는 사실과 세세한 생활의 도식을 빌려, 보는 이에게 현실생활의 본질을 체험케 한다는 것. 서사를 전제로 한다고는 하지만 ‘그 서사와의 거리두기’가 있지 않으면 이러한 그림은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에게 서찬석 작가의 그림은 너무나 ‘서정적’이기 때문이다.

cctv로 잠시 ‘인디아트홀 공’에서 또 다시 밤을 지새우는 서찬석 작가의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끊임없이 그리기를 반복한다고해서는 얻을 수 없는 미묘한 지점에서의 능숙한 움직임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천부적 재능의 락스타들의 연주 모습에서 봤던 모습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사를 전제로 하면서 ‘서사와의 거리두기’가 가능한 것이 바로 저 연주 모습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배우고 몸에 익은 기억된 근육의 움직임이 아닌 불현듯이 보였다 사라지는 붓의 움직임이 이 설명하기 어려운 ‘서정’을 가능케 했나보다는 추측이 든다.

지금 내 방에는 서찬석 작가의 2016년 작 “왜 나에게 싸우라고 했습니까”가 벽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처럼 아직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그 이유 중에 하나를 방금 서찬석 작가의 ‘그리고 있는 모습’에서 본 것 같다.

내일 1월 20일(토) 서찬석 작가의 네번째 개인전이 시작된다. 바라고 있던 악당의 재습은 없었지만, 이번 전시는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볼 수 있는 전시일게다. 그렇다고 눈을 감으라는 말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인디아트홀 공’을 空으로, 工으로, 公으로, 그리고 서찬석 작가가 좋아하는 축구공처럼 신나게 갖고 노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서찬석 개인전 – THIS is (NOT) a LOVE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