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 이미 오월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이다. 오월은 지역적인 문제가 아닌 민족의 문제이다. 오월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오월은 추억이 아닌 오늘의 현실이다. 오월은 민주다 통일이다 내일의 조국이다… ” – 소설가 박혜강 <운암대첩> 기록 중

꽉 채운 30개월을 저당 잡혔던 나의 군 생활 일기의 마지막 장은 “환멸과 치욕과 수치와 멍에의 날들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깊은 상흔은 회한뿐’이라는 휘황스러운 수사로 장식된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천일의 날 중에서도 1991년 5월에 대한 소리와 냄새와 촉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은 “보수대연합”이라는 미명하에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당시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김영삼은 군사정권 청산을 요구하던 민의를 뒤로하고 거대한 여당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도 점점 심해졌고, 1990년 11월에는 구속된 양심수가 1,259명에 달했다. 공안정국은 노태우 재임 기간 내내 지속되었고, 해가 바뀐 1991년 봄에만 분신 또는 의문사로 총 13명이 사망했으며, 2,361회의 집회가 있었다.

1989년 6월 입대를 했던 나는 전투경찰로 차출되었다. ‘빽도 없고, 운도 없는’ 놈들이라는 자조가 내가 속한 전경 부대에서는 스스럼없는 농담이었다. 특별한 기술도 남다른 체력도 없는 고만고만한 놈들을 모아 놓은 군인도 경찰도 아닌 신분으로 자긍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집단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내부적으로는 상하 계급 간의 구타가 일상이었고, 외부적으로는 폭력 경찰로서의 위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국가 공인 최말단 철부지 공권력이었다.

1991년 4월 백골단에 의해 사망한 고 강경대 열사의 운구차 광주 진입을 막기 위해 전국의 전투 경찰은 5월 광주에 집결됐다. 5월 13일 광주에 도착해 시내에서 산발적인 시위 진압에 동원됐던 부대는 5월 18일부터는 운암동 어린이 대공원 뒷산에서 밤새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19일 새벽에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로 담배도 나눠 피며 담소도 나누던 순간도 잠시 운구차가 톨게이트를 통과했다는 소식과 함께 학생들의 기세에 밀려 작은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속한 부대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패잔병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어린이 대공원까지 밀려 내려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쇠파이프로 흠씬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매질은 계속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신만은 또렷했다. 10여 미터 앞에 5월의 신록을 즐기는 단란한 가족이 돗자리 위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순간 그 가족 중 아빠와 매를 맞고 있는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가족의 아빠가 학생들을 진정 시켜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들은 너무도 평화롭게 김밥을 먹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를 모른체하던 그 가족이 전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맞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기 때문이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던 결과다. 나를 둘러싸고 쇠파이프로 내려치는 7~8명의 학생에게도 작은 원망도 없었다. 형식상 때리는 것인지 방석복(전투경찰의 진압복)이 성능이 좋아서인지 아프지도 않았다. 모로 쓰러져 맞으면서 바라본 5월의 푸르름만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날 밤, 나는 광주가 집인 부대 동기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친구 아버지는. “여기가 어디라고 광주엔 와가지고… , 그러니 매를 맞지”라는 농을 하셨다. 그제서야 나는 광주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 했다. 나의 의지로 결정된 일들은 아니지만, 80년 5월 광주에게 호되게 회초리를 맞은 날이었다. 그때의 일이 “운암대첩”이라 불리는지는 최근에 알게 됐다. 당시 운암동에는 전투경찰 대략 15개 중대의 2,000여명이 집결해 있었고, 1991년 5월 투쟁 중에서 유일하게 학생들의 승리로 기록된 투쟁이었다고 한다.